광복 80주년이 가까워오고 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땅에 묻히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총칼을 들고 싸웠고, 조용히 외교로, 혹은 정보망을 통해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그 이름은 잊혔고, 어떤 이는 먼 타국의 차가운 땅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해외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며, 그들의 의미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유를 되새기려 합니다.

김규식: 외교의 최전선에서 외로웠던 독립투사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외교관이자 교육자였습니다. 미국 프린스턴대 유학 후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파견되어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외교 무대에서 나라 없는 민족의 절박함을 알렸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대리를 맡으며 외교전의 중심에 섰습니다.
광복 후에는 좌우 통합을 시도하며 북측의 김일성과도 협상했지만, 시대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납북되어 북한에서 생을 마감하고, 현재 그의 묘는 평양에 있습니다. 한국 땅에 묻히지 못한 그의 외로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립은 총칼보다 외교로 올 수도 있다” — 김규식의 신념
서재필: 첫 미국 시민권자,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
서재필은 한국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로,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의학박사이자 정치활동가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해 국민 계몽에 앞장섰고, 독립협회를 통해 개화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강연하고, 후원하고, 사람들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귀국했을 때, 그는 이미 너무 늙었고, 한국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원했다” — 서재필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
이회영: 6형제 전 재산 헌납, 만주의 맨발 독립군
이회영은 조선 말기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자, 나라를 위해 전 재산을 바친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직후, 여섯 형제와 함께 서울의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이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는 직접 무기를 들고 일본군과 싸우다 끝내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일본 헌병에 의해 고문 끝에 사망합니다. 그의 시신은 끝내 어디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회영의 삶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의 전형이며, 그 이름조차 오랫동안 금기시되었기에 많은 국민은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잘 모릅니다.
“조국을 잃고 살아남는 건 수치다” – 이회영의 유언
이범윤: 간도 자치국 건설, 변방에서 제국과 맞선 사나이
이범윤은 간도 지방에서 독립군을 조직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청나라와 일본이 연이어 침탈해오던 간도에서 그는 조선인 자치지역을 만들고 ‘간도자위군’을 조직해 외세에 맞섰습니다.
그의 활동은 20세기 초 가장 과감한 ‘지역 자주 독립’ 실현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조국으로부터의 지원은 없었고, 해방 후에도 이범윤은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삶을 마치며, 지금도 그곳 어딘가에 묻혀 있습니다.
“나는 국경의 장수였다. 제국들 사이에서 조선을 지켰다” — 국경에서 사라진 이름, 이범윤
김산(장지락): 혁명가, 이념에 스러진 이름 없는 영웅
김산(본명 장지락)은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 혁명에 참여한 국제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이념 아래 조선과 중국의 독립을 동시에 도모하며,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본에 맞섰습니다. 미국 언론인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은 그의 삶을 생생히 기록했지만,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금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1938년 숙청당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어느 무덤에도 이름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 더 많은 젊은이들에게 국제적 시야와 연대의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나는 세계시민이자 조선인이다” — 김산의 목소리
해외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은 단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상징성을 넘어, 우리가 얼마나 그들을 잊었는지를 증명합니다. 그들의 삶은 국경을 넘어섰고, 이념과 체제, 계급과 출신을 넘어 오직 조국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삶을 복원하고, 기억의 지도 속에 다시 새겨야 합니다. 국립묘지에 그들을 안장하지 못했더라도, 기억의 묘지에라도 그들의 이름을 반드시 남겨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