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 속의 양심,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와 스페인 제국의 원주민 정책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문명 충돌의 시작이었다.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빠르게 식민지화하며 원주민 사회를 무너뜨렸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유럽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모든 스페인인들이 정복과 착취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한 인물,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정복의 시대에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누구인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1484–1566)는 스페인 세비야 출신의 성직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신대륙으로 건너가 정복자들과 함께 쿠바와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활동하며 토지를 받고 원주민 노역을 허락받은 엔코미엔다 제도의 수혜자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속한 제도와 행동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느꼈고, 결국 원주민 착취에 대한 회의와 회개로 이어졌다. 이후 그는 교회에 귀의해 도미니코 수도사가 되었고, 남은 생애를 원주민의 인권 보호와 식민지 정책 비판에 바쳤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식민 정책의 실상. 엔코미엔다 제도의 본질

스페인이 신대륙을 정복한 이후 채택한 주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엔코미엔다(Encomienda)였다. 이는 스페인 왕이 특정 정복자에게 토지와 함께 원주민 노동력의 ‘관리권’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겉으로는 ‘문명화와 기독교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사실상의 노예 제도였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과중한 노동, 학대, 질병, 기아로 목숨을 잃었고, 아메리카 인구는 정복 후 수십 년 만에 90% 이상 감소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라스 카사스의 회심과 <인디아스의 파괴에 대한 짧은 보고서>

1514년, 라스 카사스는 오랜 고뇌 끝에 자신이 소유한 엔코미엔다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원주민 보호에 나섰다. 그는 왕정과 교회를 상대로 지속적인 로비 활동을 펼쳤으며, 결국 1552년 <인디아스의 파괴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출간한다.

이 책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자행된 스페인 정복자들의 잔혹함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당시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유럽 내 종교 개혁 세력과 반스페인 진영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흑색 전설(Black Legend)’ 형성에 활용했다.

“원주민도 신이 창조한 인간이며,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다.”

이는 당시 스페인 내에서 논쟁이 된 ‘인디언도 인간인가?’라는 철학적, 신학적 질문에 대한 명확한 반론이었다. 그는 원주민들이 복잡한 정치체계,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들어 그들의 ‘문명성’을 인정했고, 이들을 전도와 교육의 대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야돌리드 논쟁: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에서. 라스 카사스 vs.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

1550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역사적인 논쟁은 식민지 정책의 방향을 놓고 벌어진 사상적 격돌이었다.
라스 카사스: 원주민은 이성과 신앙의 능력이 있는 인간이다. 폭력적 정복은 부당하다.
세풀베다: 원주민은 열등하고 미개하므로 정복과 지배는 정당하다.

이 논쟁은 결론적으로 승자 없이 끝났지만, 라스 카사스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스페인 제국 내에서도 일정한 제도 개혁을 이끌어냈다. 라스 카사스의 지속적인 압력과 고발은 결국 스페인 정부로 하여금 1542년 ‘신법(Leyes Nuevas)’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 법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

엔코미엔다 제도의 단계적 폐지
원주민의 노예화 금지
총독과 관리들의 권한 제한

하지만 이 법은 식민지 현지의 강한 반발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이후 대부분의 조항이 무력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 카사스의 노력은 ‘인권 보호’라는 개념을 공식적으로 제도화하려는 첫 시도였다.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 보호를 위해 초기에는 흑인 노예제 도입을 제한적으로 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자신의 발언을 깊이 후회하며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비판과 반성을 지속한 사상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원주민 보호와 흑인 노예 문제: 라스 카사스의 또 다른 논란

초반에는 흑인 노예제를 지지했으나…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 보호를 위해 초기에는 흑인 노예제 도입을 제한적으로 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자신의 발언을 깊이 후회하며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비판과 반성을 지속한 사상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라스 카사스의 유산: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식민주의’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반론

라스 카사스는 오늘날 식민주의 비판, 인권, 평등, 종교적 관용과 같은 가치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유엔(UN)과 인권 단체에서도 그의 사상은 자주 인용되며, 인권 운동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의 이름을 딴 대학과 연구소도 존재하며, 현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는 “아메리카의 보호자(Protector de los Indios)”로 기념되고 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정복의 시대, 신앙과 권력이 교차하던 현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부르짖은 인물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동안 묻혔지만, 오늘날 그의 글과 행동은 역사 속에서 진정한 정의와 인권의 씨앗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남긴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식민주의의 유산, 인권의 보편성, 그리고 역사를 대하는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