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5일, 대한민국의 광복절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공휴일로, 일제강점기 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끝없는 희생의 결실로 찾아온 해방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광복절은 단순한 국경일을 넘어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민족의 자긍심을 새기며 미래를 기약하는 의미 깊은 날입니다.
광복절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일제강점기 동안에 한국인은 문화와 언어, 민족 정체성 탄압 속에서도 민족 의식을 끝까지 잃지 않았습니다. 1919년 일어난 삼일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해외에서의 여러 독립운동을 거쳐, 1945년 일본 패망으로 결국 해방이 선포되었습니다. 광복절은 이 역사적인 순간들을 기념함과 동시에 우리의 독립운동 정신과 희생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숨겨진 광복절 이야기 3가지
- 광복절은 1945년 ‘진짜 독립’이 아니었다: 미군정과 남북 분단의 그림자
광복절은 일반적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로 알려져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한반도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날이 바로 ‘진짜 독립’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실제로 광복 직후 한국은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의 군정 하에 들어가게 되며, 자주적인 정부가 수립되기까지는 또 다른 시련의 시기가 시작됩니다.
미국은 한반도 남부를, 소련은 북부를 점령해 각각 미군정과 소련군정이라는 군사 행정체제를 운영합니다. 미군정은 한국인의 독립정부 수립 요구를 뒤로한 채 미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만의 귀국 지원과 좌익 세력 탄압입니다. 이로 인해 좌우 대립이 격화되었고 남북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며, 결국 1948년에는 남한의 단독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며 한반도는 완전히 분단됩니다.
즉,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외세의 개입과 분단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단순히 경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 이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왔고 어떤 외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는지, 그것이 현재의 우리나라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까지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 태극기, 광복 이후에도 제대로 펄럭이지 못했다: 금지와 혼란의 역사
많은 사람들은 광복절이 되면 태극기를 집에 걸고 나라사랑을 되새깁니다. 그러나 의외로 광복 직후 태극기의 사용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미군정이 들어선 1945년~1948년 사이 당시 한국은 공식 국기가 정해지지 않았고, 태극기를 사용하는 것도 제한적이었습니다.
미군정은 당시에 새로운 국기 채택에 대해 논의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태극기가 일본제국의 잔재와 연관될 수 있다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태극기를 변형한 국기안들이 여러 차례 제안되었고, 임시정부 태극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한성임시정부나 상해임시정부에서 사용한 태극기의 도안과 색상은 지금의 태극기와 다소 차이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도안 통일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10월 15일, 정부는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제정하며 그 사용을 법제화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광복절과 태극기의 연결고리도 사실은 복잡하고 아픈 역사 위에 세워졌던 것이었습니다.
- 광복 후 ‘친일파 처벌’은 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나?
광복절이 다가오면,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행사가 전국에서 열립니다. 그와 동시에 친일파들에 대한 처벌 또한 광복 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친일 인사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요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제정된 법이 바로 반민족행위처벌법(약칭 반민법)입니다. 이 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탄압하거나 협력한 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민법은 시행 초기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체입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이지만, 정권 안정과 미국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친일 경찰, 관료 출신을 중용했습니다. 그 결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친일 경찰의 습격을 받았고 주요 위원들이 체포당하거나 사임하게 됩니다. 결국 반민법은 사실상 1년도 채 못가 무력화되었고, 친일파들은 정치, 경제, 교육계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창룡(일제 경찰 출신,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 특무대장 역임), 노덕술(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은 일제 경찰 출신)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광복 이후 우리는 ‘외세로부터의 해방’은 이뤘지만, 내부의 적, 즉 친일 세력 청산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사실은 현재까지 중요한 이슈로 남아 있습니다. 광복절을 기리는 것 만큼이나 그날 이후의 과오를 직시하고 청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광복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광복절은 과거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며, 오늘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며 앞으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결의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